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문단 편집) === [[의순공주]] === 도르곤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원래 도르곤은 이후 만주 황실의 외척이 된 몽골 유력 부족(대표적으로 칭기즈칸의 후예인 [[보르지긴]]씨, 누르하치에 가장 먼저 복속한 몽골의 에르더트씨 등등) 외에 전주 이씨도 만주 황실의 외척으로 편입시킬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만주족들은 몽골에게 망한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몽골부족의 회유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청황실은 이런 몽골 부족들과 대대로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러니까 몽골 부족의 공주들은 청나라의 비빈으로 오고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황후도 몽골 부족의 하나인 [[다우르족]] 출신 고불로씨였다.), 청나라 황실의 공주들은 이런 몽골 부족의 왕들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대에 걸쳐 계속 되다보니 청황제와 몽골공주들은 4-6촌간의 근친결혼이 되어버리는지라 청나라 말기 황제들이 다 단명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당시 도르곤의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아들을 얻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래서 1650년(효종 1년)에 도르곤은 [[효종(조선)|효종]]의 딸과 혼인하려 했으나, 딸을 다시 [[청나라]]로 보내기 싫었던 효종[* 본인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병자호란 이후의 [[환향녀]] 문제를 생각하면 조선 왕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들 모두 자신들의 여성 친족이 청나라 만주족 남성과 혼인한다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했을 것이다.]은 "혼기가 찬 딸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효종은 청나라의 도르곤에게 자신의 딸이 겨우 2살이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와 달리 효종에겐 그 당시 기준으로 혼인을 생각할 만한 딸들이 있었다. 당시에 효종의 장녀 [[숙안공주]]는 15살, 3녀인 [[숙명공주]]가 11살이었다. 효종은 자기 딸만 숨긴 게 아니라 조카 딸, 즉 [[소현세자]]의 딸들도 지키려고 "이미 혼인했거나 너무 어리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현세자에게는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5명이 있었는데, 그 중 2명은 어려서 일찍 죽었고 3명의 [[군주]](세자의 적녀)가 생존해 있었다. 효종은 자신의 친딸 뿐만 아니라 조카딸 3명도 어떻게든 조선인 사위를 데려다가 일찍 결혼시켰다. 다른 방계 왕실의 종친들도 다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거나 숨기기 급급했다고 하는데, [[공녀]]도 아니고 정식 구혼 신청에 이런 반응이었으니 당시 반청 분위기를 알 만하다. 이때 당시 효종과 [[소현세자]]의 딸들은 혼사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장성했고, 실제로 [[숙안공주]]는 이미 혼사가 진행 중이었다. 어떻게든 청나라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이 효종은 이 해에 서둘러 [[소현세자]]의 장녀인 [[경숙군주]]를 혼인시켰고 다음해 1월에 자신의 장녀 [[숙안공주]]까지 혼인시켰다. 이때 효종은 청나라의 눈에 띌까봐 왕의 딸 혹은 왕의 조카딸로서는 이례적으로 간소하고 급하게 혼인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선왕 [[인조]]의 3년상 중이었는데 원칙적으로 왕이 죽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왕녀의 혼인은 미루어져야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숙군주와 숙안공주 모두 간격조차 얼마 두지 않고 최대한 빨리 부마부터 뽑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주족에게 시집 안 보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신하들이 '아무리 그래도 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국혼을 치루는 건 예법에 어긋납니다'라고 비판했지만 효종은 "그대들이 논한 것은 만세의 떳떳한 예이고, 오늘날 처한 경우는 한때의 권도이다. 상도(常道)와 권도는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며 국혼을 강행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111005_002|효종 1년 11월 5일 을묘 2번째기사 ]] 아버지 인조의 3년상이고 예법이고 뭐고 간에 어떻게든 가족들을 두번 다시 청나라에 보내지 않으려 하는 효종의 다급한 심정이 나타나는 부분. 이러던 와중에 금림군 이개윤[* [[성종(조선)|성종]]의 8남인 익양군(益陽君) 이회의 후손이라고 한다.]이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나섰다. 기록상으로는 금림군이 자원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왕실과 조정에서 금림군에게 어떤 압력을 가했을 수도 있고, 왕족이지만 가난했던 금림군이 [[청나라]]에 줄을 대기 위해 딸을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 義順公主. "의롭게 순응했다" 하여 효종이 내린 이름이다. 본명은 이애숙.]로 책봉해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에게 효종의 친딸이라며 속인 것은 아니고, 시집 갈 나이의 친딸이 없어서 종친의 딸을 대신 보내는 것으로 공식 합의하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당시는 [[병자호란]]의 상처로 인해 반청 분위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금림군은 "청나라가 [[지참금]]조로 보낸 비단을 노리고 딸을 보냈다"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당했다. 또한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의순공주]]도 "오랑캐에게 시집가 정조를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오랑캐 친족과 재혼까지 해서 몸을 더럽혔다"면서 환향녀로 치부하여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금림군이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뭔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금림군에 대한 나쁜 소문은 그를 모욕하던 이들의 악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림군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딸을 보내는 걸 기피해서 조선 조정이 매우 난처해했다가 금림군과 [[의순공주]] 덕에 모면한 걸 생각하면, 금림군과 의순공주를 욕했던 자들은 뻔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후 [[의순공주]]가 조선에 귀국하자, 금림군은 삭탈 관작 당했다가 이후 복귀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의순공주]] 또한 [[공주]] 직위를 잃었다. 그런데 정작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오자, 도르곤의 눈에 [[의순공주]]와 [[시녀]]들의 외모가 매우 빈약(...)해서 조선 측에게 시녀들을 다시 보내라며 불평을 터뜨렸다. 하지만 청나라가 사실상 중국을 평정한 상태에서 그 실권자에게 시집 보내는 여자가 상대방이 화낼 정도로 추녀였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아니면 단지 도르곤의 취향이 매우 특이했다거나.--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송골매'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선을 기 죽이기 위해 트집을 잡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시녀 중 1명을 측복진(양첩)으로 맞이했고, 그 시녀에게서 유일한 딸을 얻었다. 이 혼담이 오갈 당시, 청나라에서는 [[김자점]] 등 친청 세력에 대한 숙청, 산성의 축조 등 조선의 반청 정책들에 대해 정면으로 지적하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는 도르곤의 청혼을 조선에서 수용하고 [[이경석]] 등 일부 대신이 책임질 것을 자청해서 청나라 측이 이를 수용하여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 언급된 도르곤의 불평 때도 겉으로는 이러한 트집을 잡은 뒤 대놓고 "미녀들을 보내면 황부왕(도르곤)이 기뻐하고 무마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신을 수십 번 보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서 조선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도르곤 본인이 제후국 왕실 여자를 구혼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의순공주]]는 측복진(후실)이 아닌 적복진(정실)임은 물론이고 혼례를 올리자마자 정실 중 으뜸인 대복진이 되었다. 이 때 만약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혼인한 뒤 요절하지 않고 찬탈을 이뤄냈다면 대복진이었던 의순공주는 '''[[황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되면 조선 왕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을 것이다. 청나라 법도에 따르면 청나라에서 황후나 태후에 오른 비빈은 친정까지 통째로 정황기 또는 양황기 만주인으로 옮겨 일종의 측근세력을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의순공주는 법적으로 효종의 양녀로써 도르곤과 혼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르곤이 황제에 즉위할 경우 전주 이씨 전체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이성계 이래 효종까지 이어온 왕통 정도는 '양황기 만주 이기야(...)씨'[* 실제로는 '리기야'라고 불린다. 이렇게 만주 씨족으로 등록된 사례도 실제로 있었다.] 같은 형태로 팔기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을테고, 효종에게 "님이랑 님들 가족도 이제 전부 만주족ㅋ"이라면서 번왕도 아니고 '친왕'에 봉하는 칙서가 날아왔을 것이다.[* 보통 버이서, [[버일러]], 군왕, 친왕 등의 작위는 그냥 만주족 아무개도 아니고 황족 중에서만 임명되었지만, 홍타이지가 차하르부 복속 후 에제이를 비롯한 몽골의 고위 왕공들을 친왕에 봉하여 황족 대접을 했듯 청이 직접 복속한 적국의 군주에 대해서는 예외가 충분히 있을 수 있었으며, 더욱이 정축하성 당시 홍타이지는 실제로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인조를 자기가 데려온 친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히는등 높은 격식의 의전을 제공했다. 물론 이것도 도르곤이 황제 대 제후왕의 예로서 존중을 해줬을거란 말이지 조선 입장에서는 고려조 [[원 간섭기]]가 다시 재림하는 셈이니 국치 중의 국치였겠지만.] 그것뿐이겠는가? 만주인도 되었겠다 황제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입조를 요구했을 수도 있고, 변발과 만주족의 복식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황제 추숭 이후 '황후'로 높여지지는 않은 점은, 역대의 황제 추숭 사례에서 혈연관계도 없는 추존황제의 생존한 부인을 황후로 받든 전례는 없다[* [[조광윤]]은 추존황제인 아버지의 부인이자 자신의 생모인 [[소헌태후 두씨]]를 태후로서 모셨지만 이는 두씨가 자신의 생모이자 적모였기 때문이지 추존황제의 부인이라 황후로 받든 것은 아니었다.]는 점과 조선과의 난처한 외교관계도 분명 감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순치제]]의 성모황태후는 [[효장문황후|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시니까]] 의순공주를 '태후'로 모신들 의순공주의 황궁 내에서의 입지는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설령 도르곤이 요절하지 않고 의순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얻었다 해도 순치제의 성모황태후가 살아있는 한 황위 찬탈의 명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도르곤이 미약한 명분 따위는 아랑곳않고 찬탈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후손들 또한 단순히 조선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는 청나라 황족 정도로만 남을 뿐 청나라 황위 계승권을 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성종(조선)|조선의 성종]]이 [[제안대군]]이나 [[월산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의 쿠데타를 겪지 않고 38세까지 무사히 왕으로 살아간 것도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이며, 훗날 청나라에서 [[동치제]]의 섭정을 하던 [[공친왕]]이 처신에 있어 크게 제약이 따랐던 것도 [[동태후]]와 [[서태후]]가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쪽은 [[무술정변|태후가 황제를 갈아치우려 날뛰고]] 삼촌이 조카를 지키려 고생하는 거꾸로 된 구도였지만.(...)] 의순공주는 혼례까지 치르고 시녀들을 다시 보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불과 7개월 만에 도르곤이 죽는 바람에[* 2차로 보낼 예정이던 [[시녀]]들은 도르곤의 사망으로 인해 다시 귀국했다.] 어린 과부가 되었다. 이후 도르곤의 시호가 추탈되고 역적으로 규정되자 의순공주는 다른 청나라 황족에게 재가했다가 또 과부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 재가 상대가 누구였느냐에 있어 각국 기록들이 제각기 다르다. 심지어 효종실록에서도 말이 왔다갔다 한다. 일단 청사고의 생몰년도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의 7남 요여민군왕 아바타이의 3남이자 도르곤의 부하로서 전공을 세워 친왕에 책봉된 단중친왕(端重亲王) 보로가 유력하다.], 금림군의 요청으로 조선에 귀국해서 [[현종(조선)|현종]] 때에 병사했다. 현종 실록(현종 실록 5권, 현종 3년 8월 18일 무오 2번째 기사)에서 금림군의 딸이 사망하자 현종이 상수(喪需,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과정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금림군이 도르곤 사후 과부가 된 딸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과 사전에 상의 없이, 청나라 조정에 부탁해서 사적으로 환국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에선 "금림군이 나라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귀국시켰다"며 금림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뒷일에 대한 기록이 중언부언인 걸로 보아 큰 외교적 결례가 되진 않은 듯하다. [[의순공주]]의 귀국에 대해 청나라에서 보낸 문서에서도 '부모 형제와 떨어져서 과부로 혼자 살고 있으니 이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돌려보낸다'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 4월 26일 갑술 1번째 기사) 도르곤이 죽은 후 그에 대한 명예를 박탈하는 등의 사후 숙청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한때 도르곤과 혼인했다가 사별한 것 말고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조선 왕족 여성을 청나라에서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서는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해서 시신 대신 유품인 [[족두리]]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의순공주]]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므로, 이런 야사는 당시 민중 사이에 퍼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금림군과 의순공주에 대한 멸시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의순공주]]의 묘는 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으며 야사에 따라 '족두리묘'로 불리우고 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 이외에도 다른 조선인 부인(측복진[* 여진족은 일부다처제였고, 첩과 정실의 지위에 별로 차이가 없었다. 일단 복진이 붙은 사람은 정실로 봐도 무방하다.] 이씨 - 이세서의 딸)이 있었는데, 이 조선인 부인이 낳은 여자아이가 도르곤이 남긴 유일한 자녀다. 도르곤에겐 여러 처부인이 있어서 다른 자녀도 몇 명 낳았지만, 조선인 부인 소생의 딸을 제외하면 모두 갓난아이 시절에 죽었다. 대신 동복형제인 도도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사후 그 아들은 다행히 도르곤 사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는다. 사실 이는 말 그대로 양자라서 무사했던 거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만약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었다면 [[계유정난|도르곤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는 경우]]가 아닌 한 도르곤 사후에 그 친아들과 생모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르곤 본인이 부관참시된 것도 그러한 숙청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도르곤의 장성한 조선인 첩 소생 딸은 말 그대로 딸이라서 황위 계승권과 무관했기 때문에 무사했던 것이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도르곤이 친아들을 얻지 못한 게 주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위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대놓고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은 희박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친아들이 목숨만 건질 뿐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으면서 그것이 간접적으로나마 멸족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격동의 시기였던 청나라 말기의 일이긴 하지만 [[광서제]]가 자식을 한 명도 얻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서거한 것은 당시 실권자였던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고 더 나아가 독살당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니, 공식적으로는 숙청에 의해 대가 끊어진 게 아니더라도 비공식적이거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도르곤의 남계 혈통을 단절시킬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황족과 외척 중 정치적 숙청을 당한 이들 대다수는 [[오삼계]]급의 대역죄인을 제외하면 적어도 도르곤처럼 비참하게 부관참시되는 일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려 [[천명제|창업군주(후금 포함)]]의 아들이자 [[숭덕제|창업군주(살아생전에 청나라 황제가 된 첫 군주)]]의 이복동생이기까지 한 도르곤이 비참하게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건 도르곤에게 친아들이 있을 경우 그 친아들도 끝이 영 좋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도르곤이 황위를 찬탈하여 청나라의 황제로 즉위해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거나 도르곤 본인은 실제 역사처럼 황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죽더라도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조선인 처첩들에게서 얻은 아들이 부친상 이후 아버지인 도르곤의 기반을 이어받아 황제가 되었다면 청나라 황실의 혈통에 조선인의 혈통이 섞인 [[혼혈]] 황제가 등극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도르곤이 부관참시된 것은 순치제가 도르곤이 살아생전에 이것을 염두에 두고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을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에서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패배하긴 했지만 조선은 만주족이 가볍게 무시할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조선은 건국 후 초기에는 만주족의 기원이 되는 여진족의 상국노릇을 200여년간 했기 때문에 누르하치도 조선과의 관계는 조심스럽게 여겼고, 실제로 병자호란때는 철저히 짓밟았지만, 이후 입관해서는 청나라는 조선을 그나마 믿을만한 조공국으로 여기고 황제들이 조선사신에 대해 여러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이렇게 만주족에 있어서의 조선의 위상을 감안할 때 순치제의 입장에서 도르곤이 의순공주와 결혼한 것은 조선의 힘을 빌려 황권을 위협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르곤이 아들을 얻기 위해 의순공주와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뿐더러 결과적으로 의순공주의 삶을 망친 셈이 되어 도르곤과 의순공주의 혼인이 반면교사로 작용했는지, 청나라 황실 남성이 조선 여인과 혼인하는 일은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 긴기야씨는 혈통상 조선계였지만 호적은 정황기의 만주인 포의 신분이라서 법적으로는 만주족으로 대우받았다.] 그로 인해 도르곤은 조선 왕실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민족 부마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결혼할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없었으므로'''(여담이지만 이 때는 청나라도 멸망한 뒤였음) 공식적으로는 부마로 꼽히지 않지만, [[조선 왕조]] 여성과 결혼한 비(非)한민족 남성으로는 [[의순공주]]와 결혼한 [[만주]]의 [[만주족]]인 도르곤 이후 두번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